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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끝나지 않은 전쟁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했다. 전쟁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등 한국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이후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맥아더 장군의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이 결정적이었다. 이어 9월28일에는 서울 탈환에 성공했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북진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달라졌다. 그 겨울 영하 30~40도를 넘나드는 혹한에 동사자까지 발생했다. 세계 전쟁사에 겨울 전투로 유명한 ‘장진호 전투’도 이때 벌어졌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가 주축인 유엔군 3만 명이 중공군 10만 명에 맞서 벌인 전투였다. 당시 유엔군은 끝 없이 밀려오는 인해전술의 중공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백마고지 전투도 국군 9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에 맞서 벌인 전투였다. 10일 내내 백마고지의 주인이 24차례나 바뀔 정도였다니 얼마나 치열했는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런 전투 중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전쟁 발발 3년1개월2일(1129일)만이다. 무수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겼지만 전쟁은 휴전했을 뿐이지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도 북한은 온갖 도발 행위를 그치지 않고 있다. 끊임없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이젠 오물풍선까지 남한으로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휴전선은 1953년 휴전 협정을 통해 생겼다. 지금도 남북 간 긴장감이 흐르는 곳이다.     올해는 9·28 서울 수복 74주년이 되는 해다. 6·25 전쟁의 교훈을 잊지 말고 지속적인 국방력 강화가 필요하다. 전쟁은 힘의 대결이고 평화도 힘이 있어야 유지된다.  강한 힘만이 대한민국과 국민을 지킬 수 있다. 노영자·풋힐랜치 거주독자 마당 전쟁 세계 전쟁사 백마고지 전투도 장진호 전투

2024-09-24

[열린광장] 격납고와 장진호 전투 생존자

오렌지카운티 터스틴의 옛 해병대 기지 격납고가 불타버렸다. 불에 타다 남은 건물이 을씨년스럽다. 이 목조 건물은 1942년에 격납고로 건축되었으며, 17층 높이에 길이 1000피트, 넓이 300피트로 1999년까지 헬리콥터 격납고로 사용하다 문을 닫았다. 오렌지카운티의 관광 명소였다.   나는 1995년 1월 13일, 그 격납고 옆의 장교식당에서 나의 북한 탈출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대상은 6·25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 가운데 하나인 장진호 전투 생존자 모임(The Chosin Few) 회원과 그 가족들이었다.   ‘Chosin Few’라는 말은 어디서 왔는가. 한국 전쟁 때 사용한 지도는 구 일본군이 만든 지도로 일본어로 표기되어 있다. 장진은 일본 발음 ‘Chosin’이다. 미국 사람들은 ‘choose’의 과거분사 chosen과 발음이 비슷하고 선민(選民)의 뜻도 포함하고 있어 ‘Chosin Few’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50년 유엔군의 북진으로 남북통일을 이루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나 했더니 중공군의 개입으로 모든 것이 수포가 되었다. 중공군 7개 사단 병력 12만 명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한 미 해병 1사단과 10군단 3만여 명을 포위했다. 약 2주간의 치열한 전투로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보았으며, 미군은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철수했다.     그날 저녁 나는 16세 소년의 탈북 모험담을 들려줬다. 나는 고향 집 땅굴 속에 숨어 있다 유엔군이 점령한 초도로 탈출해 소나무 가지로 움막집을 만들고, 배급받은 월남 쌀로 연명했다. 단벌로 입고 나온 옷에서 이가 생겨 모닥불 위에서 옷을 털면 팝콘 터지는 소리와 고약한 냄새가 났다. 어머니가 그리워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으로 되돌아가다 검은 구름을 만났다. 선장은 검은 구름은 폭풍이 올 징후라며 배를 돌려 초도로 돌아갔다. 구름은 지옥으로 가던 나의 길을 가로막았다.   두 달 후, 탱크 수송선이 약 2000명의 피난민을 군산으로 이송했다. 흥남 철수 작전에 비해 조용한 초도 철수 작전이었다. 한국 방문 당시 그 탱크 수송선이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봤다.  뱃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고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장진호 전투 생존자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의 북한 탈출을 도와주고 한국과 미국에서 일자리까지 제공해 준 은인입니다.” 그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나의 연설은 마무리됐다.     며칠 후, 나의 상사에게 감사장이 왔다. ‘당신 사무실의 북한 출신 공무원이 우리 ’Chosin Few‘ 생존자와 가족들에게 감동적인 연설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글 끝에 ‘Semper Fi’라고 적었다. 라틴어로 미 해병대의 좌우명, ‘영원한 충성’이란 말이다. 장진호 전투 생존자들은 대부분 고인이 됐고 격납고도 불타버렸다. 하지만 Semper Fi 정신은 살아있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광장 격납고 장진호 장진호 전투 헬리콥터 격납고 장진호 북쪽

2023-12-18

한국전 장진호 전투 영웅 별세

  ■  「   」   6.25 전쟁의 격전지였던 장진호 전투에서 활약했던 스티븐 옴스테드(사진) 미 해병대 예비역 중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92세.   24일 미국의소리(VOA)에 따르면 그는 지난 20일 버지니아주 애넌데일 자택에서 병원으로 옮겨진 뒤 숨을 거뒀다. 뉴욕주 올버니 출신인 옴스테드 장군은 미국 해병 1사단 소속 병사로 6.25 전쟁에 참전해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에서 맹렬히 싸웠다. 장교로 진급한 뒤 1989년 3성 장군으로 예편하면서 41년간의 군 생활을 마쳤다. 이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부 부차관보를 지냈으며 장진호 전투 기념비 건립 추진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12월 미국 해병 제1사단이 함경남도 장진군과 함주군 일대에서 영하 30도 안팎의 혹한 속에서 중공군 제9병단과 맞붙은 전투다. 미 해병대는 당시 10배 가까이 많은 12만명 규모의 중공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퇴각 작전을 수행했다.   옴스테드 장군은 2017년 6월 29일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박물관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만났다. 당시 문 전 대통령은 옴스테드 장군에게 고개를 90도 가까이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옴스테드 장군은 문 전 대통령의 양복 옷깃에 장진호 전투의 상징인 ''고토리의 별'' 배지를 달아줬다.   문 전 대통령은 미군의 도움으로 흥남 철수 때 월남한 실향민의 아들로서 미군 참전용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10만명의 피난민을 구한 흥남 철수는 미 해병대가 장진호 전투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면서 가능했던 작전이다.   고인의 장례식은 27일 콴티코의 해병대 기념 예배당에서 열리며 콴티코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철재 기자게시판 장진호 장진호 영웅 장진호 전투 한국전 장진호

2022-07-25

장진호 전투 미군 70년 만 부모 곁 안장

미시간 지역 언론은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기관(DPAA) 발표를 인용, 한국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행방불명된 육군 소속 윌리엄 E.캐벤더 병장의 유해가 고향 미시간주로 돌아와 가족 품에 안겼다고 지난 14일 전했다.   캐벤더 병장은 이날 오후 어릴 적 살던 동네인 미시간 중부 소도시 레슬리에 있는 공원묘지의 부모님 곁에 안장됐다.   안장식에는 육군 소속 현역 및 예비역 장병들이 다수 참석했고, 예포로 애도와 조의를 표했다.   캐벤더 병장은 1950년 11월 28일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인근에서 소속 부대원들과 함께 중국군의 공격을 받은 후 실종된 것으로 보고됐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평생 기다리던 부모님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이미 팔순이 다 된 두 여동생이 오빠의 유해를 맞았다.   이들은 “오빠와 나이 차이가 10살 이상 나기 때문에 많은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오빠가 해외로 파병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알고 있다”며 “오빠의 실종은 가족 모두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고 전했다.   이어 “오빠가 하늘나라에서 부모님과 다시 만나는 생각을 하며 위로로 삼는다”면서 “유해로나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정부의 노력에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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